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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9일 토요일

영초언니 - 서명숙 (2017)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힘쓰셨던 분들 앞에서는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의 감정도 갖게 된다. 나는 "영초언니"의 시대보다는 많이 민주화되었던 1989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죽써서 개준" 노태우 정부 때였고, 일상의 대학 생활에서 "운동권"을 직접 경험한 거의 마지막 세대인 것 같다. 1학년 때는 일주일에 두세번은 집회가 있었고, 항상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학교를 감싸고 있었다. 학회실 한켠에는 화염병이 있었고, 집회 때는 가까운 선배들이 그 화염병을 던졌으며, 동기들 중 일부는 투사로 변신했다. 고작 집회 몇번 참가해서 구호 외치는 정도로는 그 미안함을 벗어날 수 없다.

또 다른 감정 하나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미안함과는 다르게 내 자신을 대하는 감정이다. 책에서 "박정희 키드"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나 또한 "사실"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 대학 입학 후 새로운 사실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때 오히려 거부감부터 갖게 되었고, 20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사실을 사실로 볼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 부끄러움을 그 당시에는 부끄러움인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거실에서 엄마와 대학 진학과 관련한 대화를 하고 있는 고3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나마 박근혜 탄핵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좋은 경험을 하였겠지만, 과연 앞으로 접할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을까? 우리 딸은 나보다는 좀더 이른 나이에 "사실"에 눈뜨길 기대한다.

책 속에는 여러 가지 모순된 상황들이 등장한다. 교도소에서 "비둘기"가 날아들고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은 자란다), "개뿔 민족 고대, 개나 주라지"에서의 막걸리 사건 (민족과 친일, 남녀차별), "김재규 장군께서 그러셨다면" (장군 부인의 이중성) 등등. 그 당시 사회는 그렇게 모순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책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가족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어머니의 편지, 동생의 분노 등. 인생의 바탕에 제주의 자연과도 같은 가족이 있다는 것은 한 개인의 성장과 성공을 넘어 우리 사회가 자리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 될 것이다.

비슷한 주제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전 독서 모임을 통해 읽었던 "소년이 온다"의 극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역시 소설은 소설이다. 소설에 비해 이책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 선배나 동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걔는 요즘 뭐한대? 누가 연락하는 사람 있어?" 오랜만에 그 시절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주렁주렁 매달려서 이어지는 또 다른 이름들이 있고, 바로 그 이름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편안함이 있다. 아마도 서명숙 작가님은 편안한 분이리라.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이 강할 것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좀더 나은 가치를 찾으려 하시는 분일 것이다.

P.S. 제목은 영초언니가 아니었으면 한다. 호송차에서 내리면서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를 외쳤던 영초언니이지만, 이 책에서는 비중있는 조연일 뿐이다. 오히려 인상에 남는 강한 캐릭터는 혜자언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07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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